한국의 초대부통령이 된 독립운동가 이시영

작성일 : 2016-03-21 16:38 수정일 : 2016-09-27 18:49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이시영(李始榮) 1869년 12월 3일 서울 저동(苧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옹(聖翁), 호는 성제(省齊)이다.

이시영의 집안은 대대로 부와 명예를 모두 다 지닌 명문가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이조판서 유승(裕承)이었다. 이시영 역시 17세에 관직에 진출한 수재였으며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09년까지 형조좌랑(刑曹佐郞), 홍문관교리 수찬(弘文館校理 修撰), 승정원 부승지(承政院 副承旨),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평남관찰사(平南觀察使), 중추원 칙임의관(中樞院 勅任議官), 한성 재판소장(漢城裁判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나라를 위해 일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시영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며 구국 운동을 하기위해 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昇薰)·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0년 결국 경술국치로 주권을 강탈당하자 그의 가족들은 구국을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가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자금을 만들어서 만주땅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부와 명예 모두를 내던져버린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이시영은 형님들인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과 동생 소영(韶榮)·호영(護榮) 등 형제들과 그 식솔들 50여명을 이끌고 남만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했다. 떠나기 전 노비문서를 모두 불 태워 노비들을 풀어주었지만 이시영을 존경했던 일부 노비들은 만주로 따라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만주에 도착한 이시영은 사재를 모두 털어 독립군의 기지 역할을 하며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주진수(朱鎭洙)·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 주요 독립군들이 속속 합류하였다.

이시영은 1911년 4월 인근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었다. 그로써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가 창설되었으며, 이상룡이 사장에 추대되었다. 경학사는 최초의 항일 구국 자치단체였다. 이들은 민생(民生)과 교육(敎育)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내 걸고 만주땅에 이주해 살아가는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도왔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설치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무려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간부들은 위대한 항일전투인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을 이끈 장본인들이었다. 당시 일본 대판(大阪)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이시영(李始榮)은 만주(滿洲)의 무관왕(無冠王)이요 만주일대(滿洲一帶)의 살인강도두령(殺人强盜頭領)이라"고 전했다. 일본제국이 이시영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머지않아 일본군대가 이곳을 습격하여 무차별적인 학살과 방화, 약탈을 범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이시영은 가족과 동지들을 이끌고 북경(北京)으로 이주했다. 그러던 중 1919년,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 동지들과 모여 3·1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곧장 상해로 가서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시영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재무총장에 전임되어 1926년까지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시영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은밀히 국내로 들어보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시영은 수차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9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었을 때 이시영은 감찰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항주(杭州)에 머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은신처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일들이 그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1931년에는 윤봉길의 상해의거를 함께 주도했다.

1933년 임시정부를 개조(改造)하여 주석(主席)을 윤번제(輪番制)로 하게 되었다. 이에 이시영은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를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와 같은 치열한 상황 속에서도 이시영은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저술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34년에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 출판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뜨거운 가르침을 주었다.

1935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확대되었다. 임시정부는 중경(重慶)으로 이전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시영은 김구와 더불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특히 1942년에는 다시 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임시정부는 공개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의 전면전을 하고 승리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군들이 고귀한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독립군이 국내로 진격해 일본과 전면전을 하려던 날로부터 불과 며칠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우리 손으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지 못했기에 광복 후에는 연합군의 개입과 민족내부의 사상분열로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다. 광복 후 그는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이 심각해지자 그는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 후로도 이시영은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원로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올곧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살았다. 1953년 4월 19일 서거하였고,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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