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독립에 바친다, 조명하

작성일 : 2016-03-21 16:34 수정일 : 2016-09-27 18:50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항일운동가는 몇 명이나 되는가? 안중근, 윤봉길, 김구, 유관순…… 모두들 쉽게 독립운동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그 이름과 업적을 말해 보라고 하면 기억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가 않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매우 적어서 늘 손에 꼽히는 몇몇 인사들만이 반복되어 나올 뿐이다. 대표적으로 안중근 열사를 떠올려보자. 안중근 열사를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주역이라는 점일 것이다. 윤봉길 열사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군 장교들을 처단하기 위한 폭탄 투척. 이것이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여기 그들과 비슷한 희생을 하고도 이름이 채 알려지지 않은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조명하 열사이다.

 

조명하 열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28년 독립운동으로 인해 서거하였다. 스물 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였다. 겨우 24년을 살았지만 조명하 선생의 삶은 그 전체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차 있었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몇 안 되는 에피소드들이 이러한 그의 희생정신과 열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1929년에 신천군청에 취직한 후 같은 고향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에 대해 듣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우선 일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같은 해에 조명하 선생은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다. 어머니와 함께 산후 조리를 하던 부인을 보러 가는 도중에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 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큰 볼일이란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왜 하필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을 보러 가던 도중이었을까?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인 독립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갓 태어난 자식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조명하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했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본을 상대로 싸우려면 일본을 먼저 알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일본 안에 있는 적들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 그는 공장직원 상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오사카상공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인에게 갖은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계속 기회를 엿보았으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겠다고 마음먹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타이완을 거쳐 상하이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타이완으로 향했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비로소 기회를 잡게 되었다.

 

타이완 역시 일본의 식민지였다. 때문에 곳곳에 일본 군인이 있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일본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타이중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는 정보를 들은 직후 구니노미야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고, 그가 일본 왕의 장인, 육군대장, 군사 참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가 이동하게 될 동선을 파악하여 거사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5월 14일 오전 9시 55분경에 구니노미야가 탄 차량이 타이중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차량에는 지붕이 없었다. 구니노미야를 환영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던 조명하 선생은 독을 묻힌 칼을 품고 달리던 차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품고 있던 독이 든 칼을 구니노미야를 향해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서 운전자를 맞췄다. 그는 거사 직후 군중에게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었다. 조명하 선생은 7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10월 10일 사형 집행 직전, 형리가 마지막 말을 묻자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명하 선생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 기사, 출처: 네이버캐스트)

 

조명하 선생의 의거는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우선 단체에 속해서 단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한 많은 독립투사와는 달리 조명하 선생은 단독으로 행동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어떤 단체의 후원이나 계획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 결국 성공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조명하는 남들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든가 독립운동의 본거지에서 살던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있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때부터는 온전히 독립운동만을 위해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처자식의 얼굴을 보는 것마저 마다하고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조명하. 그러한 의지를 가진 선조가 있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놀랍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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