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 이진룡 장군의 위대한 생애

작성일 : 2016-03-21 16:24 수정일 : 2016-09-27 18:50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이진룡 장군은 1879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진룡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15세에 이미 경서를 통달할 정도로 영특했다. 의암의 제자로 수학하며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유교적 정치윤리사상과 확고한 항일민족의식을 가슴 깊이 새겼다. 올바른 선비의 성품을 지녔고 무예까지 출중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이진룡 장군은 183cm의 큰 키에 기골이 장대하였고 힘이 셌다.

 

 

1905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이진룡은 애국청년들을 규합해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박기섭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이진룡은 의병대의 선두에 서서 5개 부대의 병사를 지휘하여 적과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후에도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보급선을 차단하는 등 활약을 했다. 하지만 여러 명의 부하들이 잡히면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불가능해지던 시점인 1911년 10월 남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봉천성에서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이면서 한국 이주민들을 규합해 애국청년소집과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청년들의 계몽운동과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만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여 국내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대규모 기구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의 앞잡이 임곡의 밀고로 관전현에서 잡혀 여순으로 압송되었다.

 

 

이진룡은 1918년 5월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죽음 직전까지도 장군은 의연하고 당당했다. 그는 형 직전에 “그런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은 즉 얼른 사형이나 집행하라"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부인인 우씨도 부군의 순국 소식을 들은 후 자결하여 뒤를 따랐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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