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최고의 현상금을 걸었던 약산 김원봉 (若山 金元鳳)

작성일 : 2016-03-21 16:23 수정일 : 2016-09-27 18:51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은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밀양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어느 하루 일제강점기인 시기에 일본왕 생일날에 학교 화장실에서 일장기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었다. 이렇게 약산은 어릴 때부터 나라를 사랑하고 일제에 대한 독립의식이 투철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원봉은 곧바로 퇴교조치를 당하였고,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향하였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13명의 인사들과 강력한 무장투쟁을 통한 자주독립쟁취를 강령으로 하는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은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1920년부터 7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요인암살과 폭탄투척을 시도했다.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등, 일제의 주요기관에 의열단 단원들을 침투시켜 폭탄테러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의열단의 무장투쟁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고, 의열단의 수장인 약산 김원봉을 잡기위해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였다. 이 당시 일제는 백범 김구에게 60만원을 현상금으로 걸었는데, 약산 김원봉에는 100만원(현 시세로 200억~ 300억)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40년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최근 영화 ‘암살’로 재조명을 받은 김원봉은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좌우 이념을 모두 갖춘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를 적으로 돌렸다.

김원봉은 항일 독립운동 역사 상 백범 김구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해방 후 김원봉이 조국으로 귀국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김원봉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10만여명에 달했다. 귀국 후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과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결국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월북했다. 이처럼 존경받았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지만, 김원봉이란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결국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현재에도 의열단장 김원봉의 위대한 삶과 피맺힌 최후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해방 후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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