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의(義)로운 그녀, 윤희순

작성일 : 2016-03-21 15:16 수정일 : 2016-09-27 18:55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윤희순 선생님이 직접 지은 <안사람 의병가>와 <경고 한다 오랑캐들아> 복사본

 

윤희순 열사는 1860년 8월 11일 경기도 구리에서 태어나, 1876년 결혼을 했다. 그리고 1896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의병단이 마을에 밥을 먹으러 올 때면 항상 집에 있는 곡식은 물론 마을 숯장수들의 곡식까지 몽땅 털어 밥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의병을 돕는 게 아니라, 마을 여성들을 몽땅 불러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며 의병을 함께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최초의 한글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이 노래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로서 한자를 모르는 하층계급이나 여성들에게도 항일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윤희순은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지도자였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많은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 일본군에게 경고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 독립단 활동, 항일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했다.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윤희순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를 따라 세 아들을 데리고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다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윤희순 선생은 중국인과 여러 우리나라 동포들의 도움으로 노학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학교운영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매일 약 25km가 넘는 거리를 오고 갔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는 1915년 일본에 의해 폐교 될 때까지 50여 명의 항일 운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윤희순 선생의 독립운동은 혼자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후세로 이어지는 폭 넓은 형태의 것이었다.

 

이후 1935년까지 여러 가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세력에게 수차례 계획이 발각되고 실패하여 일본경찰에게 쫒기며 여기저기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그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독립이라는 희망만을 보고 살다가 끝내 아들 유돈상이 심한 고문으로 죽자 선생님도 11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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