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ue leader of Mansukjigi family, Yoon Se Yong

작성일 : 2016-01-15 15:00 수정일 : 2016-09-27 18:56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Yoon Se Yong was born in 1868 in Kyungsangnamdo. His family was rich so he could have lived a comfortable life. However, after Japan overtook his country, he gave up his wealth and exiled to china. He diposed his family money and raised indepedence fund while crossing the Aplok river with his brother Yoon Se Book. After arriving at Manju, Yoon Se Yong wanted overseas Koreans not to forget their nation and gain will for independence. With the help of his brother, he organized a school for independence.

 

He ordered his school name to be Dongchang because it stands for infinite development and independence of the country. He teached history, Korean, and many other things. Furthermore, Yoon Se Yong supported his students with clothes and food to encourage them not to give up. Thanks to his hard work and support, the school was able to train many outstanding individuals for over ten years. However, due to the suprpess of Japan, Dongchang school finally had to close in 1923.

 

<동창학교 1회 졸업생 사진>

 

General Yoon Se Yong strived harder to gain independence for his nation after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June 1920, he carried out missions to transport weapons with General Hongju. Moreover, he helped many other organizations achieve their goal. He continued independence movement after his 60s and finally passed away in 1941.

 

In 1962, the Korean Government gave Yoon Se Yong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for his hard work.

 

 

만석지기 가문의 진정한 지도자, 윤세용 장군
 

 

백암 윤세영은 1868년 경상남도 밀양의 만석지기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문에서 편히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1910년 일제가 나라를 침탈하자 모든 부귀를 포기하고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독립자금을 만들어 동생 단애 윤세복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에 도착한 윤세용은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동포의 자녀들이 조국을 잊지 않고 독립의지를 키우길 바랬다. 투철한 애국지사를 육성하는 것이 조국 독립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11년 2월 동생과 힘을 합쳐 자신의 재산을 털어 민족학교를 세웠다. 학교 이름을 무궁한 발전과 국권 회복을 기약한다는 취지에서 ‘동창’으로 정했다. 교과서는 단군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고 있었다. 역사·국어·한문·지리 등을 고르게 가르쳤다. 윤세용은 학생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숙식은 물론 옷까지 제공하였다. 그의 헌신과 지원 속에서 동창학교는 그후 10여년이 넘도록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감시와 탄압을 시작했고 1914년부터는 회유와 협박이 더욱 심해졌다. 결국 독립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이어간 민족학교 동창학교는 1923년 그렇게 문을 닫아야만 했다.

 

윤세용 장군은 3.1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대한독립단 간부 홍주와 같이 무기 운반작업을 감행했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참모로 맹활약하였으며, 192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자 윤세용은 동참하여 열띤 활동을 했다. 1926년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 도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29명이 전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자 참의장(參議長)으로 추대되어 사태를 수습하는 동시에 부대를 재편성하여 침체되어 있던 참의부는 체제를 정비하고 재건할 수 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노령의 윤세용은 대종교에 입교하여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북만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62년 윤세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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