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명열사 : 한징

작성일 : 2015-10-12 18:33 수정일 : 2015-10-12 18:33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한징(韓澄, 1886.2.20..∼1944.2.22.) 선생은 서울 남부 죽동에서 태어났다. 한징의 호는 효창(曉蒼)으로, 1893년에서 1921년까지 한학과 국학을 공부하였다. 그 결과 15세에 사서삼경에 정통하였다. 아울러 우리말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1927년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사전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하였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 시기의 대표적인 반일학술단체였다. 조선어학회의 주요 사업은, 우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여 우리 민족이 표준어를 사용하여 우리 말글의 통일에 앞장서도록 한 것이었다. 또한 기관지인 『한글』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한징은 「양문대신의 언문 시」(『한글』48, 1937. 9.)라는 글에서, 조선후기 대신이었던 이서구가 지은 언문 시를 소개하기도 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이름을 연구하여 「조선말 지명」(『한글』48, 1937, 9.)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마지막 과제는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국어사전 편찬은 언어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진행하던 이 사업은 자금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1936년 조선어학회로 인계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와 감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제는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의 인사들과 활동을 주시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한징도 이극로, 이윤재, 김윤경, 이희승, 최현배 등과 함께 일제의 요시찰인물에 해당하였다.

 

결국 1942년 10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하였다. 사전 원고도 사전편찬원과 함께 함흥으로 이송되었다. 또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에 한글날 기념행사를 해왔는데 일제는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한글날에 민족의식을 고취하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 행사를 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거행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족말살차원에서 조선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사들은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전개한 한글운동은 우리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이요 언어독립운동이었다.

 

한징 선생은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선생이 남기고 간 우리 말글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는 후손들에게도 여전히 전해내려오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 편안하게 사용하고 혹은 훼손하는 이 한글. 이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조상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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