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명열사 : 황상규

작성일 : 2015-10-09 15:40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백민 황상규는 1890년(1891년 설도 있다) 경상남도 밀양군의 밀양성내 노하골(현재는 밀양시 내이동)에서 창원 황씨 문옥(文玉)과 허경순(許敬順)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별호를 백민(白民)이라 했고, 별명은 관운장(關雲長)이었다.

 

황상규 선생의 가정배경과 학업이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가정이 빈한했고 독학을 했다거나, 밀양 향교 안에 1909년 설립된 진성학교를 졸업했다는 얘기만 전해진다. 다만 선생의 활동 전반에 대해 동아일보에서는 “한없이 강직하며 용감하여 기대를 많이 받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백민 황상규의 항일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의열단의 제1차 국내 특공거사 추진에 참여한 것이다. 황상규 선생은 우리나라 무장투쟁의 핵심인 의열단 건립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벌어진 의열단의 제 1차 암살파괴계획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경성京城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세 곳에 폭탄으로 공격을 계획한 이 공작은 그 전에 단원의 집에 숨겨둔 폭탄이 발각되어 시도에 그쳤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단원 대부분이 고문과 감옥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독립운동의 전투성을 크게 거양시켜 준 선도적 사례였다. 이번 사례가 주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긴 김원봉은 보다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워서,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및 서장폭살 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폭파 의거,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진입 투탄의거 등을 연이어 성공시킬 수 있었다

 

황상규 선생은 검사의 유죄 결정으로 기소되었고, 14명의 다른 피고와 함께 1921년 3월부터 경성지법의 재판정에 세워졌다.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 과정에서 갖은 악형과 고문이 가해졌음에도 선생은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어 한 마디도 자백하지 않았다. 때문에 검사는 그의 혐의사실을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겨우 인지하여 극히 일부만 적시하게 된 것이어서, 그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기소’처럼 되고 말았다고도 한다.

 

선생은 24일에 김태희와 함께 마포의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그리고는 거의 6년 만에 밀양 내이동의 집으로 돌아온 그의 귀에 애통하기 그지없는 말이 먼저 들어왔다. 전년도와 금년도에 아들·딸 하나씩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냥 주저앉아버릴 그가 아니었다. 이후 고향 밀양으로 돌아간 황상규 선생은 밀양 청년회 운동, 신간회 운동 등에 전념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항일 운동에 헌신했다.

 

1931년 9월 2일 밤, 밀양 자택의 병석에 누워있던 선생은 영영 눈을 감고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나는 죽어도 집에서는 죽지 않고 대중을 위하여 밖에서 일하다가 밖에서 죽겠다”고 늘 다짐하던 그가 돌연 신병을 얻더니 41세의 이른 나이에 집에서 별세하고 만 것이다.

 

선생의 일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그의 가족이 항상 가난을 면치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았다는 것이었다. 항상 나와 내 가족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을 앞세웠던 백민 황상규, 우리는 선생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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