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명열사 : 연기우

작성일 : 2015-09-22 18:14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

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연기우 선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태어난 일시도, 사망한 곳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의 많은 의병들이 같은 처지일 것이다. 의병이란, 말 그대로 신분이 높거나 유명한 나라의 지도자들도 아닌 일반 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부대였기 때문에 의병 출신으로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은 많이 않다.

 

경기도 삭령 출신인 연기우 선생은 강화진위대 부교였을 때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에 격분해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선생의 의진을 비롯한 주요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경기도 양주로 모여든 연합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선생은 서울진공작전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나 일제의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경기, 황해지역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임진강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신무기를 구입해 무장을 강화하였고,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군자금과 물자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지역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연기우는 공사를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삭령 등지로 행군하는데 아들이 찾아와서 온 가족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정황을 고하였으나 꾸짖고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부하 중의 한사람이 몰래 아들에게 50원을 주었으나 그것을 안 연기우는 크게 노하며 "이것은 군수금(軍需金)이다. 누가 감히 사사로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돈을 빼앗았다.

 

그의 순국에 대하여는 두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즉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는 1910년에 체포 피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는 「매일신보」1914년 6월 23일자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부친 연성한(延成漢)과 함께 인제 일본헌병분대에 의하여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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