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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적지 탐방 4 (을지로)작성일 : 2015-03-08 23:49 수정일 : 2015-03-12 13:57 작성자 : 이제희 (mjjm1203@naver.com) 항일 유적지 답사 코스 : 이시영 6형제 집터 ? 이재명 의거터 ? 김익상 의거터
1. 이시영 6형제 집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가문은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인 이항복이 10대 조이며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경주이씨 명문가였다. 이시영은 6형제 중 다섯째였다. 당시 서울 중구 일대 2만평 넘는 땅이 이시영 가문의 땅이었다. 이시영 형제들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60여명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문의 전 재산을 팔았고, 떠나기 전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몇몇 노비들은 만주까지 6형제를 따라갔고 독립운동에 함께 참여했다. 이시영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교장을 맡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2천여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시영과 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을 조직했고,학우단 청년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활약 하였다. 넷째 이회영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일본군 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이시형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일제에 의해 고문 받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가난으로 인해 굶어죽었다. 홀로 살아남은 이시영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받았고,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이 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통치행위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시영집안의 소유였던 서울 중구동 일대의 땅을 되찾아 주려고 했지만 이시영은 내 땅을 찾으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이시영은 6·25전쟁 중에 둘째아들을 잃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2. 이재명 의거터 1890년 태어난 이재명은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하와이 이민 모집에 응모하여 미국본토로 건너갔으나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바로 귀국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김구가 쓴 ‘백범일지’를 보면 이재명의 명동성당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어느 날 김구는 이재명이란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를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찾아가 총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재명의 아내는 남편이 이완용을 직접 죽이겠다고 하자 걱정한 나머지 의거를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아내에게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느냐며 화를 낸 것이었다고 한다. 훗날 명동성당 의거가 있은 후에야 김구는 자신이 빼앗았던 총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하며 안타까워했다. 김구에게 총을 빼앗기고도 이재명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이재명은 1909년 12월 종현성당(현재의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의 배와 어깨에 중상을 입혔지만 암살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1910년 9월 순국했다. 3. 김익상 의거터 1895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김익상은 조국에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 두고 중국으로 떠나 의열단에 합류했다. 김익 문화 최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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